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범생이 탈출을 시작하겠다. 어디론가 가야하는데 길을 모른다면 대부분 스마트폰 지도 앱을 먼저 켤 것이다. 현재 위치를 찍고 목적지를 입력하면 추천 경로와 소요 시간이 나오기 때문에 길을 몰라도 걱정이 없다. 범생이 탈출은 무엇보다 많은 예측 불가능성을 담보하는 일이기에 우리 또한 일종의 지도를 가지고 길을 떠나보려 한다. 지도 앱만큼 안심하고 믿고 떠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현재 위치 : 나는 어떤 범생이인가

길 찾기를 하려면 먼저 자신의 현재 위치를 알아야 할 것이다. 당신은 어떤 범생이인가? 범생이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 범생이의 삶에도 다양한 좌표가 있으니 자신의 위치는 어디쯤인지 확인해보자.

  1. 쭈구리 범생이

이 범생이는 남의 눈치를 많이 본다. 누가 “우리 점심에 뭐 먹을까?”라고 물어보면 “아무거나요” 하거나 “뭐 드시고 싶으세요?”하고 역으로 질문을 돌리는 스타일이다. 먹고 싶은 게 있는데도 눈치가 보여서 말을 못하거나, 실제로 자기가 먹고 싶은 게 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자기 표현’도 맘대로 못하고 ‘자기 욕구’도 인식이 안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설명을 읽고 ‘완전 난데’라고 생각이 드는 사람이라면 어렸을 때 부모나 교사 등의 권위자가 자신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마 기억도 할 수 없는 오래 전부터 ‘니가 원하는 건 틀렸어’, ‘넌 내가 하라는대로 해’의 압박 속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크다.

쭈구리에게는 ‘안전함’의 욕구가 매우 크다. 잘못해서 혼나거나 실패하면 어렸을 때 감정이 되살아나 두렵고 불편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이들은 무지 애를 쓴다. 최대한 열심히 남의 눈치를 살피고 자기 욕구는 죽이면서도, ‘만약에 잘못되면 어떡하지?’의 나쁜 시나리오가 계속 그려지기 때문에 걱정도 무척 많은 것이 쭈구리의 특징이다.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설에 따르면 안전의 욕구를 가진 사람은 그것이 충분히 충족되어도 다음 단계인 소속감의 욕구를 지향하게 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어딘가에 잘 속하고, 잘 섞이는 전략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자신이 현재 쭈구리 상태라면 범생이 탈출까지 소요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겠다.

  1. 완벽주의 범생이

이 범생이는 철두철미하다. 누가 “우리 점심에 뭐 먹을까?”라고 물어보면 엊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먹은 식단이 머리 속에서 정렬 되고, 가장 후회가 없을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엄청난 검색을 한 후 결정을 내리는 스타일이다. 완벽주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과’이다. 이들은 완전무결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모든 노력과 에너지를 집중한다.

그래서 언뜻 보면 일 잘하고 높은 성과를 내는 사람일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다. 완벽주의 범생이들은 결과가 안 좋을 것 같거나, 머리 속에 그려지지 않으면 아예 시작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과가 안 좋을 때 핑계를 대기 위한 구실을 자기도 모르게 만들고, 오히려 일을 미루거나 지연되게 하면서 마음에 안 드는 결과를 만든 자신이나 타인을 비난하는 악순환을 자주 겪는다.

실수를 피하려고 도전도 안 하는 완벽주의 범생이들에게는 ‘살다보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어쩌다보니 잘 됐다’는 경험을 할 일이 거의 없다. 자기 직관을 따르거나,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사람을 믿고 맡기거나,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좋아서 해보는 이런 시도들이 완벽주의자에게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잘 되어도 자신이 예상한 시나리오 안에 있는 그림 정도이고, 그게 안 될 것 같으면 온갖 애를 쓰며 주변 사람까지 그에 동참하도록 닦달을 하기 때문에 완벽주의 범생이의 삶은 매우 피곤하고 거칠거칠하다.

범생이 탈출은 완벽한 결과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여정이다. 실수와 시행착오를 피해갈 수 없고 도전과 실패의 연속 안에서 오직 실행만을 통해서 만들어나가는 길이다. 자신이 ‘준비-조준-발사’가 당연하다고 믿어온 완벽주의 범생이라면 ‘준비-발사-재조준’의 세계로 들어갈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할 필요가 있겠다.

  1. 달관형 범생이

이 범생이는 위의 두 유형과는 달리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은 없다. 얼핏 보면 사회성도 좋아 보여서 ‘범생이 계열’로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누가 “우리 점심에 뭐 먹을까?”라고 물어보면  “뭐 별 거 있나요. 대충 먹죠” 이렇게 말하는 스타일이다. 점심 한 끼로 인생이 행복해지는 것도 아닌데 그게 뭐 대수냐는 입장이다.

달관한 범생이에게는 인생에 새로운 마음으로 임할 일이 거의 없다. 세상은 다 그냥 그렇고, 사는 건 원래 별 게 없고, 돈 버는 건 원래 힘든 것이고, 저 사람은 원래 저러니까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늘 뭔가 통달한 듯 말해서 어쩔 땐 되게 쿨해 보이는데, 실은 달관이 아니라 체념이나 포기인 경우가 많다.   

이 범생이는 자신에게 무언가를 바꿀 힘이나 영향력, 선택권이 없다고 믿는다. 세상의 틀이나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은 완전히 고정되어 있고 불가항력적이라 애써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뭔가를 잘 해보려는 사람을 비웃고, 인생에 완전한 만족은 없다고 희망을 갖기를 포기해버린다.

이러다 ‘쿨함’을 넘어 달관의 한도를 초과할 정도로 외부 상황의 압력이 커지면 이들은 ‘투덜이 범생이’, ‘희생자 범생이’의 캐릭터로 급격히 변한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 힘 없고 착한 사람인데 세상이 엉망이고, 사람들이 개념 없고 악해서 자신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모든 것을 바라본다.

성실하게 살면 뭔가 있을 줄 알고 달려온 사람들 중에 이런 유형이 굉장히 많다. 숨 차게 결승선을 향해 달렸는데 골인을 해서 보니 환호나 보상도 없고, 또 다시 뛰어야 하는 상황을 수도 없이 겪다보니 이런 태도를 갖게 된 것이다.

자신이 이 유형의 범생이에 속한다면, ‘어차피 노력해도 바뀌는 건 없다’고 믿고 있는 뿌리 깊은 신념부터 저 폭염 속에 태워버리길 바란다. 그것 하나만 달라져도 다른 어떤 범생이보다 급진적으로 탈출이 가능할테니.  

목적지 찾기 : 범생이가 아니라면 무엇이 될 것인가

세 유형의 공통점은 모두 착실하게 열심히 산다는 것, 그러면서도 자기 삶에 만족을 못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에서 벗어나 완벽하게 범생이를 탈출한 각자의 모습은 어떨까? 어떤 의무나 강요에도 압박 당하지 않고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대로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삶이 펼쳐질 것 같은가? 생각만 해도 숨통이 트일 수도, 예상 외로 그리 좋지 않은 그림이 떠오를 수도 있다.

  1. 문제아 혹은 망나니

원하는대로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참 좋기는 하겠지만 그러다보면 제 할 일에 소홀해지고 사람 사이의 예의도 없어져서 막 나가는 사람이 될 지 모른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한 번 제대로 망가져본 적도 없으면서 왜 그런 시나리오를 미리 쓰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바로 그 생각이 지금까지 범생이의 삶을 지탱해 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범생이로 오래 살아온 사람에게는 범생이가 아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범생이가 아니고도 무엇을 잘 할 수 있는 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래서 자신이 지켜온 규율과 의무가 사라지면 완전히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욕 먹고, 소외 되고, 망하고, 우울해져서 범생이를 탈출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실제로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별로 만족스럽지도 않은 삶을 붙잡고 있는 이유가 자신에 대한 불신,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직시하는 것이다. 걱정하지 마시라. 시행착오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망나니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1. 자유인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면, 더이상 누구의 지도편달을 받을 필요가 없는 자립한 성인이라면, 우리가 당도할 곳은 훨씬 더 멋지고 근사한 곳이어야 한다. ‘내가 여기에 오려고 그 고생을 했구나’ 싶을 정도의 충만감과 홀가분함, 자유로움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범생이를 완전하게 탈출한 그 사람을 나는 이제부터 ‘자유인’이라 부를 것이다. 범생이가 그러하듯 자유인 역시도 그 상태에 머무르는 시간은 찰나에서부터 영겁에 이르기까지 사람마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다. 다만, 처음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까지가 오래 걸릴 뿐, 한 번 그 세계를 맛 본 사람은 다시 그 곳으로 가는 것이 훨씬 수월해진다.

자유인의 삶이란 돈에 예속 되지 않을 정도의 부를 거머쥐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유유자적하는 그런 삶이 아니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누구의 지배나 권위에도 종속되지 않고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자신의 내적 동기를 길 안내 삼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자유인이다. 자유에 동반되는 책임의 무거움을 알고, 자신의 자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자유도 충분히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 자유인이다.

자유로 가는 길

다음 시리즈부터 자유인으로 가기 위해 채비해야 할 것, 버려야 할 것 등에 대해 차례로 소개를 할 것이다. 사실 ‘범생이 탈출 지도’는 일반 지도와는 달리 현재 위치와 목적지를 안다고 해서 명확한 경로 안내가 제시 되지 않는다. 이 세계는 오로지 지금 있는 곳에서 한 스텝을 뗀 다음에야 다음 갈 길이 보이는 세계이다. 그 한 스텝이 그렇게 어렵다. 이 시리즈가 그것을 도울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쁠 것이다.

자유인에 이르는 소요시간은 자신의 범생이 유형에 따라 다를 수 있겠다. 경우에 따라서는 단기에도 가능하지만, 세 가지 범생이 유형 모두에 걸쳐져 있는 사람의 경우 장기 프로젝트라고 생각하고 임할 것을 권한다. 뭐든 혼자서는 힘드니 함께 가자.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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